상응하는 언어를 찾아서



 동북 헬프는, 후쿠오카 모모코씨와 협력하여, 후쿠시마의 지원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후쿠오카씨는 재해 직후부터 후쿠시마의 피난자에 전화를 이용하여 계속 지원을하여 500명을 넘는 사람들의 콜 센타 역활을 담당하고 계시는 크리스찬입니다.

동북 헬프는, 후쿠오카씨의 콜 센타에서 요청을 받아, 현장에 갑니다. 자치 회장님 이나 생활 지원과 과장님, 어떤때는 각 그룹의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역활입니다.

요번 후쿠오카씨가 소개하여, 가와우찌촌 안에 있는 가설주택에 지원하러 갔습니다. 그 보고와 함께 오른쪽에 후쿠오카씨의 통신을 소개하겠습니다. 지원하면서 느낀것과, 통신에서 말하고자하는것은 하나의 과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상응하는 언어를 찾아서」라고하는 과제입니다.



어제 (2013년7월27일(토)) 우리들은, 가와우찌촌 안에 있는 가설주택을 방문 했습니다. 노래와 오차의 시간을 피난자와 함께 보내기위함 입니다. 참가한 사람은, 저・가와카미(목사)와, 크리스찬 카운셀라, 크리스찬 가수, 그리고 불교의 스님이신 이대씨, 그리고 무슬람의 나제르 나가노씨입니다. 타 종교, 다른 직종의 칼라플한 팀이었습니다.

아침, 6시반에 출발하여, 10시에는 가와우찌촌에 들어갑니다. 원발 폭발 사고현장에서 40킬로정도 떨어진 가와우찌촌입니다. 현장에서 30킬로정도의 장소에 가설주택이 있습니다. 공간 방사량은, 센다이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그대로 원발 사고 장소를 향해 차로 달렸습니다. 후쿠오까쵸에 들어가면서, 급격히 공간 방사량 측정계가 높은 수치를 나타내기 시작 했습니다. 방사량 측정계는「0.3」으로, 경보를 울립니다. 경보를 울리는 기계는 그 수치 그대로 높은 수치를 나타내며 사고 현장에서 7킬로까지 가까이 갔을때, 기계는 「1.5」 를 넘는 수치를 보였습니다.

의료기관에서는, 이 수천배의 방사능을 받으며 검사를 받는다며, 그런 격려의 말이 생각났습니다만, 역시 생명의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운 계곡의 모습. 푸르름이 빛나고, 계곡물은 청량하게 흐르며, 꽃들은 서로 자랑하듯 아름답게 피어있고, 댐의 거대함과, 매미가 여름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디에도, 위험을 느낄수가없었습니다. 그저 공간 방사량 측정기가 경보를 울리고 있을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없습니다.

가설주택에서는, 모두가 노래하고, 오차를 마시며, 이야기를합니다. 생활의 고통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밝고, 원자력 발전소의 이야기는 하지않습니다. 제1원발 3호기가 고농도의 방사량 수증기를 내며 품어올리는것도, 11월부터 4호기의 연료봉을 꺼내는 거대한 작업을 시작하는것도 아직 정전이 되었던것도 화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들은 오차 모임을 떠나 개별적으로 이야기할때 심각하게 이야기한 화제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사람을 고오리야마 역에 데리고 갔을때, 공간 방사량 측정기가 경보음이 울렸습니다. 「0.4」라는 수치를 냅니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변함이없는 대도시의 모습. 사람들은 비 속에서 젖으면서 걷고있다. 이것은 기계가 잘못된것일꺼야. 아니야, 어떤것일까・・・그러한 이야기를 차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란합니다. 이 상황을 이야기 해야 할 언어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단어도 상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쿠오카씨로부터 오른쪽의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배상금」을 둘러싼 피난자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곳에 구체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역시 어울리는 단어를 찾지 못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우리들은 두가지 언어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나는, 권리와 정의를 말하는 「정치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자와 자금을 배분하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승부를 결정하는 언어이고, 패자에게는 화를 불러 일으키는 언어입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이 「정치 언어」로 이 현실에 안주하려합니다.

또다른것으로, 이해 득실을 말하는 「경제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것을 수치화 하려고 내어지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확률중에서 모든것이 언어가 되어(인생은 한번밖에 없는데!) 냉철한 계산식 안에 우리들을 가두어놓는 언어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이 「경제 언어」로 이 현실에 안주하려합니다.

「정치 언어」와「경제 언어」。양쪽 모두 언제나 듣는 언어입니다. 한쪽에서는 원자력 발전소를 호소하는 중에 언제나 듣는 언어. 한편으로는 원자력 발전소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논쟁중에서도 언제나 듣는 언어.

그래도, 어느쪽도, 이 현실에 안주하는 「상응한다」라고는, 생각 되어지지 않습니다. 어느쪽도 「한사람」보다는 「모두」를 보는듯한 생각이듭니다. 따라서 어떠하든간에 현장에 서면, 「상응하지 않는다」 라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긴급히, 전혀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만약 전세계를 얻었다하여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경제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것이겠지요.

또 예수님은, 「자기의 자식이 구덩이에 빠졌어도, 정의와 권리의 이름 아래 그것을 구해주지 않을수 있겠는가」라고, 엄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치의 언어」의 한계를 말씀하시는것이겠지요.

예수님을 쫓아간다면, 「생명의 언어」가 있는것같이 느낌니다.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하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모두」를 그리더라도 「한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언어입니다.

그러한 언어를 지금 우리들은 간구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어제의 여행도 그것을 찾는 여행이었겠지요. 이 여정은 확실히 막 시작했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등의 핵 시설에서만 생겨나는 플루티움이라는 물질은 2만4천년을 경과하지않으면, 그 폭력적인 힘이 반으로도 줄지않는다고 합니다.

여행은, 지금 막 시작했을뿐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는 여행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 2013년7월28일 가와카미 나오야 씀 )